본문 바로가기

LOHAS Life

옛사람의 손길로 가장 한국적인 백자를 빚다...[대한민국 명장 14호, 한도 서광수]

인사동 거리를 걷다보면, 외국인들이 참 많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그 나라를 방문할 때 "가장 그 나라스러운 곳" 을 보고 싶어하듯,
그들도 "가장 한국적인 것" 을 보기 위함이겠지요. :)

그럼 어떤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 일까요? 

국내에서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국적인 백자를 빚는
몇 안되는 도예가 중 한분인, 한도 서광수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풀반장은 그날 그곳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달항아리"를 만났습니다. :D
여러분도 함께 가시죠.

+오늘은 풀무원 사외보 <자연을담는큰그릇>의 기사를 먼저 포스팅하겠습니다.
다음주에는 풀반장의 취재 뒷얘기가 이어집니다. 후후후..



 
 도자기 명장 한도 서광수 
 옛사람의 손길로 옛것을 빚다

 대한민국 명장’이자 ‘경기도 무형문화재’, 도자기를 빚은 지 2011년으로 꼬박 50년째 되는
 장인 중의 장인이다. 백발의 수염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데 문득 손에 올린 백자
 달항아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꾸미지 않아도 그윽하다. 찬바람 몰아치던 겨울 어느 날,
 한도 서광수 명장을 그의 요장에서 만났다.




“가스 가마로 도자기 100개를 구우면 100개 모두 똑같습니다. 그것은 상품이지 작품이 아니죠. 하지만, 전통 가마로 구우면 자리마다 색과 분위기가 다 다릅니다. 색이 퍼지는 진사(辰砂, 백자) 등이 나오는 이유에요.”
거의 50년간 전통 방식으로만 도자기를 만들어온 도예 ‘명장’(대한민국 명장 14호) 한도(韓陶) 서광수(徐光洙•62) 씨는 “왜 전통 방식만을 고집하느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도자기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겠다는 도예가적 장인정신이 잘 묻어난다.
서 명장은 그러면서 “당장의 이익을 추구했다면 도자기를 이 같은 전통 방식으로 절대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돈을 위해 장인 정신을 포기하는 요즘 세태를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만드는 도자기는 대체로 실용적인 생활 용기보다 감상용 도예품이 많다. 실용적인 그릇을 만들려고 했다면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전통적인 장작 가마 방식을 고수할 이유가 없다는 것.

1, 2 서 명장이 전통 가마를 고집하는 이유는 불의 흔적과 번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몇 달 간 일한 노력은 장작 가마에서 판가름이 난다. 가마에서 나온 달 항아리를 살펴보는 서 명장.


가장 전통적인, 가장 한국적인

서 명장은 국내에서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국적인 백자를 만드는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문화재전문위원인 임영주는 그에 대해 “가장 한국적인 백자를 제작하는 몇 안 되는 도예가 중 한 명”이라고 평했다.
경기도 이천에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요장 ‘한도요’에 들어서면, 표지석이 서 있는 곳부터 길 한쪽에는 장작더미가 ‘도열’해 있다. 조금 걸어가면 초당과 가마 등이 눈에 들어온다. 초당 앞마당에 차를 세우자, 검은 개들이 컹컹 짓는다. 초당을 돌아서면 요장 건물 오른쪽으로 6개의 가마가 눈에 박힌다.
“전통 가마로 도자기를 만드는 방식은 흔치 않나요?”
“이곳 이천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도
자기를 만드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많은 곳에서 전기가마나 가스가마를 사용하고 있어요. 우리는 가스가마 등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있지요.”그래서 그는 일찍이 ‘도평요’에서 일하던 시절 미술사학자 최순우로부터 “가장 전통에 가깝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자기 제작 방식에서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모든 과정이 다 중요합니다. 흙을 잘 만들어야 하고, 도자기를 만드는 성형도 잘해야 하며, 조각과 유약도 잘해야 하죠. 물론 소성도 매우 중요하고요. 아무리 도자기를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가마에 들어가서 (작품이) 나오지 않으면 끝입니다.”


전통 가마에 소나무로 불을 지펴

서 명장은 주로 백자를 만들기에 경기도 여주, 충남 서산, 경남 하동 등 전국 곳곳에서 흙을 사온 뒤 섞어 사용한다. 그는 “흙은 붙는 힘과 함께 색상이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발을 이용해 물레를 돌리는 ‘발 물레’ 방식으로 도자기 성형 작업을 한다. 이 같은 전통적인 성형 기법이 무지 백자 항아리에 독특한 힘으로 나타난다는 분석이다. 성형 이후 그림을 새기고 유약을 바른다. 유약과 안료도 자연에서 채취해 직접 만들어 쓴다고 한다. 유약은 만드는 도자기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한다. 마지막 소나무와 전통 가마를 이용, 최소 26시간에서 많게는 36시간까지 쉼 없이 불을 지펴 도자기를 굽는다. 불은 1300도가 넘는다고 한다. 그가 굳이 소나무를 사용하는 이유는 화력이 세기 때문이며, 전통 장작 가마를 고집하는 것은 불의 흔적과 번짐을 중시하는 작업 방식 때문이다. “전통 장작 가마에 사용되는 불은 예측할 수 없는 색감을 빚어냅니다. 똑같은 그릇이라도 불을 많이 받은 곳과 적게 받은 곳, 불의 온도 등에 따라 빛깔 등이 다 다르죠. 균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좋은 작품을 건져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서 명장은 몇 달간 일한 노력이 장작 가마에서 판가름 나기에 정성 들여 불을 지핀다. 보통 1년에 5, 6회 정도 굽는다. 하지만, 그는 가마 불을 다 땐 후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도자기에 대해선 가차없이 망치로 박살 낸다. 6칸짜리 장작 가마에 대형에서 소품까지 도자기 80점에서 많게는 150여 점까지 넣고 굽지만 최종적으로 도자기가 되는 ‘성공률’은 30% 안팎. “평균 100개 넣으면 30개 정도가 도자기로 나온다고 보면 됩니다. 또 ‘좋다’거나‘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도자기는 더 줄어들죠. 진사의 경우 한 점도 못 건질 때도 적지 않아요.”

3 코발트와 자연철 등으로 만든 물감들. 4,5 전통적인 발 물레를 돌려 자기를 빚는 서 명장.


13살에 흙과의 인연을 시작

1948년 10월 25일(음력 9월23일). 서 명장은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에서 가난한 농부 아버지 서순태와 어머니 조덕분 사이에서 6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5형제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당시 여느 농가처럼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신둔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61년 흙과의 인연을 일찍 시작했다. 현재 ‘광주도요’ 자리에 위치한 동네 그릇 공장에 취직한 것. 그는 “전문적인 도자기가 아니라 화분 등을 만드는 칠기 공장이었다”며 “학 몇 마리를 그린 화분, 꽃병 등을 서울 남대문시장 등에 내다 팔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만 13세.힘든 일을 하면서도 밤이나 쉬는 날에는 그 동안 어깨너머로 본 것을 열심히 연습했다. 그래서 3년 만에 그릇 만드는 전 과정을 알게 됐고, 웬만한 형태의 그릇은 모두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됐다.
1963년. 서 명장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바로 한국 전통 백자 전문가였던 도암 지순택(1912∼1993)이 강화도 신립 등에서 가마를 하다가 이천으로 내려와 ‘고려도요’를 열자 그의 문하생이 된 것이다. 지순택에 대한 서 명장의 평가다.“풍채가 좋은 지 선생은 도자기나 골동품을 볼 줄 아는 분입니다. 재료나 형체 등을 잘 보고 제대로 평가할 줄 알죠. 또 일본말도 잘해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반드시 도자기를 사가게 하죠.(웃음)”

6 물레를 돌린 뒤에는 모양을 깎고 다듬는 성형 작업을 해야 한다. 7 가라앉은 유약을 풀고 섞고 있다. 역시 도석, 석회석, 대리석 등 5가지 돌 가루로 만든 제대로 된 옛 그대로의 유약이다.


한국 도자기의 부활

서 명장은 고려도요에서 흙 만지는 일부터 불 일까지 전 과정을 성실히 배우며 착실히 실력을 쌓아갔다. 1971년 도자기를 만드는 성형(成形) 실장, 1974년 불을 주관하는 소성(燒成) 실장을 맡는 등 1976년까지 지순택에게서 도자기를 배웠다. “요장이 커지면서 성형실 직원도 10명이 넘었고 전체 직원이 100명에 이르기도 했어요. 저는 어린 나이에도 성형 실장과 소성 실장을 맡아 요장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지순택에 뒤이어 전통 청자 재현에 재능을 가진 해강 유근형(해강고려청자연구소 설립자) 등도 이천에 정착하면서 이천의 도자기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1968년 지순택과 고려도요가 일본 <아사히신문>의 1개 면에 자세히 소개되면서 한국 도자기의 부활을 주도하던 이천 도자기가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는 전기가 마련됐다. 조선 도자기를 선망하는 수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아사히신문>을 들고 고려도요를 찾아왔던 것이다.
1976년 서 명장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이후락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도평리에 세운 ‘도평요’의 가마장으로 스카우트됐다. 도평요에서 1986년까지 10년간 가마장으로 성심 성의껏 일했다. 이 실장에 대한 회고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자기를 하면서 자신의 (급한) 성격을 많이 잡은 것 같습니다. 처음 불 때문에 도자기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난리가 나곤 했지만, 자기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성질을 많이 죽인 것 같아요.”

8 장작으로는 소나무만을 고집한다. 숯이 생기지 않아 1300도 넘는 강한 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9 서 명장은 성형, 유약, 그림, 채색, 가마 등 도자기 제작의 전 과정을 소화해내는 명장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천도자기축제를 처음 열다

1986년. 서 명장은 이천의 사기막골에 위치한 전통가마 방식의 요장인 ‘산보요’에서 작업장을 세내 독립된 자신만의 작업장을 열었다. ‘한도요’의 시작인 셈이다.
“한 친구가 사기막골 요장 1000평을 샀다며 5년만 일해달라고 해서 도평요를 그만두고 들어갔어요. 알고 보니 친구 가마가 아니라 서울 사람 것이었죠. 저는 100만 원씩 세를 주고 그곳에서 가마를 시작한 것이죠.”
그는 이 해에 동료 도예가 청파 이은구, 유광열 등 6명과 함께 ‘이천도자기축제’를 열었다. 소박하게 시작된 이천 도자기축제는 2001년 세계도자기 엑스포로 발전하는 등 이천 도자기 발전의 견인차가 됐다. 그는 이 같은 공로로 1994년 문화부 장관이 주는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1992년. 잠깐 다른 곳에서 가마를 하기도 했던 서 명장은 현재의 ‘한도요’가 위치한 신둔면 남정리로 이사했다. 이에 앞서 땅을 산 뒤 당국의 허가를 받아 가마를 박고 흙을 가져와 다져 요장을 지었다. “처음 이곳에는 20여 개의 다랑치 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모두 메운 뒤 요장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다

서 명장은 수광리 ‘한도요’에 자리한 이후 18년간 계속 백자를 중심으로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들어오고 있다. 2003년 대한민국 명장 제14호에 선정됐고, 2005년에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됐다. 서 명장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전 과정을 소화해낼 수 있는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 명장은 흙의 배합뿐만 아니라 성형 유약 그림 채색은 물론 소나무 장작불을 지피는 도자기 전 과정을 소화해내는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김재광, 2006, 222쪽) 그는 흙을 만드는 것부터 발로 물레를 차고 돌려 도자기를 빚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유약을 만들며, 전통 장작 가마로 굽는다. 그래서 백자와 청자, 분청사기, 진사 등 모든 도자기 장르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젊은 시절 여러 요장에서 다양한 일을 하면서 도자기 일을 배운 때문이다.

10 조각을 마친 목단에 청화(푸른 물감)를 바르는 서 명장. 11 전통 장작 가마에서는 같은 그릇이라도 불을 많이 받은 곳과 적게 받은 곳, 불의 온도에 따라 빛깔이 다르게 나타난다. 12 요장에 마련된 그의 전시장. 도자기 인생 50년을 맞는 2011년에는 '예술의 전당'에서도 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의 깊은 멋
물론 서 명장이 가장 잘 만드는 도자기는 역시 백자다. 그는 젖 색깔(유백색)의 전통 백자를 제대로 구현한다는 평가다. 그의 백자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옛날의 깊은 멋과 맛이 우러난다. 대표적인 작품은 유럽에 전시되기도 했던 1986년작 ‘백자철죽 문호’다. 서 명장은 실제 ‘어느 분야를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백자 무지 쪽”이라며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백자 달항아리”라고 말했다. 그의 ‘백자 달항아리’는 작품성과 예술성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백자 달항아리는 도자기를 따로 만든 뒤 상하접합(上下接合) 방식으로 겹쳐 만들기에 일부는 찌그러진 모습을 띠기도 한다. 서 명장은 요즘에도 새벽 일찍 일어나 ‘한도요’에서 흙을 다지고 물레에 흙을 올려 지문이 닳아 없어진 손으로 도자기를 빚고 있다.


 
 글을 쓴 김용출은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한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세계일보>에
 입사,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등을 거쳐 현재 문화부에서 영화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쓴 책으로
 <독일아리랑>, <독서경영>(공저) 등이 있다.



*사진|톤스튜디오
*본 컨텐츠는 풀무원 사외보 <자연을담는큰그릇>에서 발췌하였습니다.

posted by 풀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