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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HAS Life

드라마 <파스타>보다 더 드라마틱한 두 쉐프의 이야기 : 주세페 바로네와 박찬일 쉐프

"한여름 제주도 만큼 태양이 작렬하는 시칠리아의 한 주방.
    날씨 만큼이나 시끌벅적한 주방에서
    쉐프로 보이는 한 이탈리아 남자가
    이제 막 삶아낸 듯한 파스타를 집어던지며 소리를 지른다.

    얼핏봐도 30대 후반은 되보이는 한국인 남자는

    쉐프의 고함을 뒤로하고 묵묵히 재료를 준비한다.

    그 후 한국남자는 고국으로 돌아와

    이탈리아의 '슬로푸드'를 한국에서 재현하는 대표적 쉐프가 되었고
    10년 전 스승과 약속했던 한국에서 요리를 해보자던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식당으로 스승을 초대한다.
                           "

드라마 <파스타>를 방불케 하는 드라마틱한 이 이야기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믿어지시나요?

저 풀반장이 자담큰 취재 현장이라며 소개해 드렸던
<음식을 통해 만나는 '느림의 미학'> 포스트 속 두분의 쉐프님들이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시거든요.
[풀반장의 현장 스케치 보러가기]

10년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구반대편 한국에 찾아온
주세페 바로네 쉐프와 그의 제자 박찬일 쉐프가 만들어낸 슬로푸드의 정수,

풀무원 사외보 <자연을담는큰그릇>에 소개된
슬로푸드의 현장으로 풀사이 가족분들을 초대합니다. ^^




슬로푸드 요리사 주세페 바로네 방한 행사
음식으로 맛본‘느림의 미학’


지중해 태양의 나라, 슬로푸드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대표적인 슬로푸드 요리사. 장난기 어린 눈매와 느긋한 입매를 가진 이 동글동글한 인상의 요리사는 “한국의 막걸리가 언젠가 일을 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그를 위한 방한 행사 ‘슬로푸드 갈라 디너’ 현장에서 마주한 주세페 바로네의 인상은 그랬다.

10여 년 전, 시칠리아에서 맺은 인연은 서울의 주방에서 다시 진지하게 이어졌다. 행사날 새벽 주세페 바로네는 박찬일 쉐프와 함께 노량진 수산시장을 직접 찾았고 키조개와 멍게를 직접 만지고 향을 맡고 맛본 뒤 골랐다. 멍게는 시칠리아에 없는 식재료다.



공책에 ‘11월 22일 오전 11시 30분 대통령’이라고 쓴다. 눈 한번 감았다 뜨니 나는 청와대 집무실에 앉아있다. 기한은 하루다. 하루 만에 평소 하고 싶던 걸 다 해놓아야 한다. 장관이 반대하든 청와대 대변인이 식은땀을 흘리든 말든 우선 ‘군대 징집제 폐지’ 기자회견을 연다. 1시간 뒤 “모든 장관과 정부부처장은 일주일에 하루는 집에서 밥을 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연다. 일본 만화 <데스노트>를 잠깐 패러디 해봤다. 공책에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정해진 시간에 그 사람이 사망에 이른다는 상황을 다룬 만화다. 내가 패러디한 노트는 <잡 노트>쯤 되려나. 되고 싶은 직업을 적으면 악마가 도와준다. 그 직업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할 필요 없고 한 방울의 땀도 흘릴 필요가 없다. 상상만 해도 신나고 재미있다.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들
현실에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진짜 이런 노트가 있다면, 이탈리아 레스토랑 <누이누이>의 박찬일 주방장이 시칠리아에서 삶은 파스타를 뒤집어쓰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게다. 직업을 바꾼다는 건 쉽지 않다. 노트에 이름을 적어 넣는 것 따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꿈이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공부를 해야 하고 어느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얼마큼 시간과 돈이 들고 그리고 나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대접은 무엇이며, 그 꿈을 이루고 나서 직업적으로 만나야 하는 사람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며 그들에게 내가 해야 할 ‘감정노동’은 어떤 것인지, ‘꿈의 기회비용’을 파악해야 한다. 머리로 100퍼센트 파악할 수 없다면,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한다.
최소한의 마음의 준비가 있던 덕분일 게다. 한여름 제주도만큼 태양이 작열하는 시칠리아에서 박찬일 주방장이 삼 십대 후반의 나이에 냄새 나는 주방에서 당근을 깎으며 성질 급한 이탈리아 주방장의 지청구를 견뎌낼 수 있었던 건. 박찬일 주방장이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기자로 오랫동안 트렌드와 음식에 대해 글을 쓰다 요리사가 된 길은 신밧드의 모험만큼 멀고 길었다. 신밧드처럼 멀고 긴 인생 항로를 거쳐 요리사가 된 박찬일 주방장은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자기가 책임진 레스토랑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이탈리아의 요리사, 한국에 오다
11월 2일 시칠리아에서 스승으로 모셨던 주세페 바로네 주방장이 강남 논현동 이탈리아 레스토랑 <누이누이>에 몸을 드러낸 것도 지니의 마법 같았다. 술자리에서 오고 간 말이 씨앗이 됐다. 올여름 어느 홍대 근처 술집이었던 것 같다. 박찬일 주방장은 불콰하게 취해 내게 “나무야, 주세페나 한 번 데려오려구. 아직 한국 한 번도 안 와본 촌부거든. 좋아 할거야.”라고 말했다. 사비를 털어 데려와 집에서 재우며 밥이나 사주겠다고 했다. 나도 밑도 끝도 없이 덜컥 돕겠다고 말해버렸다. 말이 씨가 됐다.



슬로푸드 운동의 대표선수?
그런 자신감은 주세페 바로네의 독특한 경력에서 나왔다. 그는 슬로푸드 운동 초창기에 시칠리아 지부를 맡아 이끌었다. 슬로푸드 운동은 1986년 패스트푸드에 반대해 로마에서 처음 일어났다. 공업적 방식으로 생산되지 않은 깨끗한 먹을거리, 저임금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는 공정한 방식으로 생산된 음식을 먹자는 취지다. 되도록 그 지역의 음식재료를 쓰자는 주장도 포함된다. 외국 음식재료를 수입하려면 석유를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르고 깨끗한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은 풀무원이 행사 후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잇달아 한다 하는 와인 업체도 후원을 약속했고, 박찬일 주방장이 책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를 낸 창작과비평사, 서울 웨스틴조선호텔도 우리의 협찬 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11월 2일 ‘누이누이 슬로푸드 갈라디너’(주최 한겨레 주관 누이누이)는 그렇게 마술처럼 열렸다. 된장을 빵에 발라먹고 불교에 관심이 많던 주세페 바로네는 제자 덕분에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피사대학 지리학과를 중퇴한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엘리트 출신인 주세페도 이런 상황을 상상하진 못했을 거다. 공부를 잘했다고 무슨 천리안이 있는 건 아니니까.


파스타를 집어던지는 다혈질 요리사
박찬일 주방장의 책에 묘사된 주세페는 다혈질이다. 말 안 듣는 요리사에게는 막 삶은 파스타를 집어던지고, 돈 많은데 음식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는 미국 졸부를 골탕먹인다. 그러나 인터뷰를 위해 처음 만난 그는 뜻밖에(?) 점잖았다. 뜨거운 지중해식 포옹도, 두 손을 오므리고 하늘을 향해 흔드는(영화 <바스터즈>에 묘사된) 제스처도 없이 점잖게 악수를 청했다. 물론 인터뷰가 30분을 넘어서자 두 손을 연방 흔들어대는 본성(?)을 드러냈지만 말이다. 레스토랑 <누이누이>의 박찬일 쉐프는 10여 년 전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공부할 때 바로 주세페 바로네의 제자였다. 그런 주세페 바로네는 이번 행사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방문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포장마차에서 먹은 산 낙지와 아귀 요리가 아주 싱싱했고 매우 인상 깊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깻잎이 들어간 시칠리아 요리!
행사 날 새벽 주세페 바로네는 박찬일 요리사와 함께 노량진 수산시장을 직접 찾았다. 키조개와 멍게를 직접 만지고 향을 맡고 맛본 뒤 골랐다. 멍게는 시칠리아에 없다. 독특한 향과 식감을 가진 한국 음식재료 멍게로 시칠리아 요리를 만든 것이다. 한국만의 로컬 푸드로 슬로푸드 요리를 구현한 셈이다. 제주 갈치와 고등어, 한치 등 다양한 한국 음식재료가 식탁에 올랐다. 심지어 깻잎, 김 기름도 요리를 완성하는 데 한몫 거들었다. 전채에서 주요리에 이르는 메뉴에 ‘바다에서 육지로의 여행’이라는 주제가 구현됐다. 음식은 ‘멍게와 키조개 카르파초(이탈리아식 육회요리)’, ‘제주 갈치와 고등어로 만든 작은 토르티노’, ‘손으로 뽑은 오징어 먹물 생면 파스타’, ‘검은 깻가루와 허브를 입힌 소 등심과 깻잎 카포나타(시칠리아식 채소요리)’ 순서로 제공됐다. 마지막은 ‘주세페 바로네 식’ 리코타(이탈리아 치즈) 디저트. 각각의 요리에는 시칠리아 와인 돈나푸가타를 함께 곁들여 냈다. 라푸가, 탄크레디, 밀레 에 우나노테, 벤 리에 등 서로 다른 풍미를 가진 네 종류의 와인이 제공됐다. 돈나푸가타는 역사가 150년 넘은 시칠리아의 대표적인 양조장이다.


검은 깻가루와 소 등심의 어울림
90여 명의 참석자는 한 가지씩 맛볼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접시를 낼 때마다 주세페 바로네 주방장은 참석자들에게 요리-와인의 궁합에 대해 설명했다.
요리사 레오 강, 리치몬드 과자점 권형준 총괄팀장 등이 머리를 끄덕이며 맛보는 모습도 보였다. 색감•질감•맛 모두 창의력이 돋보였다. 나는 특히 검은 깻가루를 입힌 소 등심의 맛에 놀랐다. 깨의 고소한 풍미가 육즙과 잘 어울렸다. 행사에 참석한 예종석 한양대 경영대 학장은 “서울에서 맛보기 어려운 시칠리아 요리의 진수다. 전채요리는 서울의 어떤 레스토랑에서도 먹어 보기 어려운 요리였다. 파스타의 소스도 다른 요리사가 한 수 배울 만하다.”라며 호평했다. 주세페 바로네 주방장은 인터뷰에서 “요리사란 요리만 하는 게 아니라 장소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국에 왔다면 이곳의 생선을 이용해서 해석하는 게 의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밤 ‘의무’를 다했다.

독특한 향과 식감을 가진 한국의 음식 재료는 슬로푸드 요리사 주세페의 손을 통해 시칠리아 요리로 완성됐다. 검은 깻가루와 허브를 입힌 소등심, 멍게와 키조개 카르파초, 손으로 뽑은 오징어 먹물 생면 파스타 등.



칼과 국자를 잡는 두 사람
펜을 잡던 손으로 칼과 국자를 들게 된 운명을 두 사람은 함께 타고났다.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가슴 속으로부터 진실한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쉽지 않아 보이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그걸 지켜보는 일은, 뭐랄까 “인생은 역시 알 수 없어”라는 클리셰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질척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래전에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만 원짜리 지폐를 찾아낸 것만큼 기쁘기도 하고,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터졌을 때 태어난 러시아산 소를 집 근처 분식집 육개장에서 발견한 것처럼 신기하기도 하고, 소주 한잔하고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기분이 착 가라앉기도 한다. 펜을 잡던 두 사람은 둘 다 국자를 잡는다.


글을 쓴 고나무는 <한겨레> 생활문화 섹션 <Esc>에서 가장 ‘개그 센스’있는 남자 기자(남자 기자 3명)로, 바람 부는 고향 제주 음식에 관한 책을 쓰는 꿈을 가지고 있다. <Esc>에서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그가 싫어하는 것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관심있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정치부로 옮겨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본 컨텐츠는 풀무원 사외보
<자연을담는큰그릇>에서 발췌하였습니다.

posted by 풀반장사용자 삽입 이미지